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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석유파동

BS blog 2022. 11. 26.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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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로 유가는 계속 고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영향은 우리 일상생활에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세수하고 향수 뿌리고 옷을 입고, 자차나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는 이 모든 우리 아침 일상에 공통점이 뭘까요? 바로 '석유'가 필요하다는 점인데요. 섬유 종류 중 '폴리'가 붙은 건 석유로 만듭니다. 의약품, 세제, 향수, 화장품과 연고의 원료가 되는 바셀린도 석유에서 얻고요. 빵과 같은 음식의 원료인 밀가루를 공장에서 옮길 때도 휘발유로 움직이는 비행기, 배, 트럭으로 이동하죠. 포장을 할 때도 석유가 주재료인 플라스틱으로 만들고 길에 깔린 아스팔트나 페인트, 농약 등도 석유로 만듭니다. 그야말로 석유 세상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석유는 몇 지역에 몰려 있는데 특히 많은 곳이 중동입니다. 석유가 검은 황금이라 불리고, 이걸 가진 게 곧 권력이죠. 그런데 이 석유 때문에 난리가 난 적이 세계적으로 두 번 있었습니다. 두 번의 오일쇼크인데요. 과연 석유파동은 무엇이고 얼마나 충격이었을까요?

석유는 6억 년 전 바닷속 아주 동물들이 죽어서 깊이 4천~6천 미터의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는데 그 위로 흙, 모래가 수백만 년간 쌓였고 더 깊이 묻힌 곳에 열과 압력이 가해져 변한 것입니다. 석유는 성경에서도 나오는데요. 노아가 방주를 만들때 배 안쪽과 바깥쪽에 피치라는 고체 석유를 바르라는 구절이 있는데, 실제로 중동 사람들이 배나 집을 만들 때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피치를 방수제로 사용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요.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원리를 일찌감치 깨우친 거죠. 그러던 어느 날 페르시아 사람들은 석유에 불이 옮겨붙어 폭발한 것을 보고 불이 잘 붙는 특성을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불화살도 그래서 만들었죠.

​석유하면 연료를 먼저 떠올리는데요. 과거엔 고래 기름이 있었고, 19세기 중반 미국에서는 매년 8천 마리가 넘는 고래를 학살했습니다. 많은 환경전문가와 동물애호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러다 1860년대부터 고래가 해방되는데요. 1854년 캐나다의 지질학자 에이브러험 게스너가 원유를 증류하는 방법을 알아낸 덕분입니다. 이때부터 석유의 진짜 힘이 나옵니다. 19세기 중엽 석유는 가정의 등잔불, 가로등 등에 쓰였습니다. 그런데 19세기 말 에디슨이 전기와 백열등을 발명하면서 사람들은 화재위험이 큰 석유를 뒤로했습니다. 이때 석유를 하드캐리한 것이 바로 자동차입니다. 1886년 독일의 카를 벤츠, 바로 그 벤츠가 휘발유로 돌리는 엔진을 발명해 자동차에 달았습니다. 1893년엔 독일의 루돌프 디젤이 디젤 엔진을 발명합니다. 그리고 1908년 헨리 포드가 자동화를 대중화시키죠. 이어서 비행기도 발명돼 모두 석유가 들어갔고요. 20세기 초부터는 플라스틱이 개발돼 석유는 다시 없어선 안될 존재가 됐습니다.


그런데 석유 가격이 갑자기 확! 오르면 어떻게 될까요? 엄청난 파장이겠지요? 이 사건을 석유 파동, 오일쇼크라 부릅니다. 1차 석유파동은 전쟁이 중심이 됐어요. 유대인들이 유럽의 민족주의에 핍박을 받으며 팔레스타인으로 옮겼는데 아랍계 원주민과 불화를 일으킵니다. 결국 1948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건국하는데 이때부터 중동지역과 이스라엘간 계속 싸우는 갈등이 시작됩니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아랍 연합국의 군사력은 이스라엘보다 세지만 군사력 최강인 미국이 이스라엘을 도우면서 1,2,3차 전쟁 모두 이스라엘이 이깁니다. 그리고 1973년 10월 중동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급습하면서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납니다. 역시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면서 이스라엘이 이기자 중동 국가들은 복수심에 자신들이 가진 원유를 안 팔겠다고 선언합니다. 수요는 여전한데 공급이 부족하니 당연히 가격이 오르겠죠? 그렇게 1974년 1월의 석유 가격은 배럴당 11.65달러! 전쟁 전 2,9달러에서 무려 400%가 올랐습니다. 최근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유가가 30% 올랐는데도 영향이 큰데 400%라니 얼마나 쇼크였을까요?

 



​석유는 이렇게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운송에 쓰이는 건 30%, 그 외 앞서 설명한 우리 일상에 석유는 훨씬 더 많이 쓰입니다. 스마트폰, 컴퓨터에까지요. 결국 이스라엘 편을 들던 나라들도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석유를 4배나 더 주고 샀으니, 전투는 이겨도 전쟁에선 진 셈이었죠.

​이후 안정을 찾나 했던 석유 가격이 1970년부터 1981년 사이 2차 석유파동으로 또 한 번 치솟습니다. 1978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루홀라 호메이니가 지도자가 되는데요. 이스라엘과 미국을 싫어하는 그가 석유 생산량을 줄이고 석유 수출을 금지했습니다. 이란은 세계 석유의 15%를 생산하는 거대 산유국이라 파장이 엄청났죠. 아프리카 산유국인 리비아의 집권자 카다피도 만만찮게 미국을 싫어하면서 석유 생산을 줄였습니다. 5대 석유 생산국 모임 오펙(OPEC)이 다같이 석유 수출량을 낮췄습니다. 그렇게 1978년 12달러 선이었던 석유가 1981년에는 37달러까지 상승했습니다. 무려 3배나요. 이때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개도국은 32%, 선진국은 10%대까지 올랐죠. 하지만 막상 미국은 1차 석유 파동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를 무조건 달러로만 살 수 있게 하면서 달러의 지위를 탄탄히 만든 덕에 큰 타격이 없었어요.

​우리나라는 어땠을까요? 1차 석유 파동땐 아직 공업화가 안돼 큰 영향이 없었지만, 2차 파동 때는 석유를 기반으로 한 중화학 공업이 대세라 1970년대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물가가 40% 오르면서 국가적으로 절약 정신을 강조한 이유입니다. 원유를 가장 많이 갖고 있던 사우디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 당시 나이프 왕자 일행을 불러 국빈 대접을 해줬습니다. 그 덕에 원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죠.

오일 머니는 석유를 생산하는 나라가 석유를 판 돈을 말합니다. 오일 달러가 넘쳐나던 중동은 도로나 항만 같은 사회 인프라에 돈을 쓰게 되면서 중동 건설 붐이 일었는데요. 70년대 대한민국을 이끈 원동력이었습니다. 이후 기업들은 중동으로 향했고 1975년 7억5천만 달러던 건설 수주액은 1980년 82억 달러로 10배 이상 늘었습니다. 이때 한국 외화 수입액의 85%가 오일 달러였죠. 근로자 수가 20만 명일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빨리빨리' 정신으로 공사 완료 예정일보다 더 빨리 끝내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물가가 오르면서 물값이 10배나 올라 적자가 우려되자, 현지 노동자들은 비가 많이 오는 3~4월 우기에 빗물을 받아 공사에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고유가 고통은 대안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태양광, 수소 에너지 연구가 시작됐으니까요. 석유와 같은 화석 에너지는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고 지구 온난화를 일으키기도 했는데요. 석유 파동은 세계가 에너지에 대해 한 번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